가장 어두울 때, 가장 밝게 빛나 보일것이다.
그래서 나와, 내 공간은 항상 어둡다.





2012. 12. 19. 01:02




많이 찍어보라, 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매번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존의 내 사고와 부딪히는 부분이 있어 혼란이 수반되곤 한다. 그래도 이번에 느낀 것은 무엇이 되었든 작업량이 많을 때,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은 그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관련없는 것들을 보고 의미없이 마구잡이로 셔터를 눌러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지하면서 다작을 할 것. <기억의 편린> 역시 그 와중에 내가 놓치고 있던 소중한 기억들을 찾아 낼 수도 있고 남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역시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제한을 두지 말고 다양한 시도를 해서 작업을 더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매번 듣고, 느끼고, 벗어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내가 설정한 틀, 경계를 지키느라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책상에 금을 두어 넘어오지 못하게 하던 짝꿍의 협박조의 언성이 허풍이라는 걸 알았다면 쉬이 그 경계를 무시했을 것처럼, 현재의 사고와 사유의 모든 틀들을 벗어나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자꾸만 바깥으로 발을 내어보아야 할텐데.





2012. 12. 18. 18:16





<기억의 편린> 작업노트


1.
작업을 위해 셔터를 누르고 결과물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과연 내 기억의 일부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처음 기획했을 때는 나만의 주관적인 기억으로 객관적인 공감을 얻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었는데 스스로도 공감을 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사진 한 장 한 장으로 남아있을 뿐, 작업을 위해 기억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생성해내고 그다지 큰 감흥이 없는 기억에 의존해 촬영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내 기억의 편린은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는 강렬한 부분 중의 하나가 되어야 나도 만족하고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을텐데.


2.
결국 가장 큰 문제는 공감의 가능성과 연관된다. 강렬한 기억의 한 장을 발견한다해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공감할 부분을 찾지 못한다면 그저 뿌연 스냅사진 외에는 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소재나 이야기의 부족함으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으며 결과물이 결국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는 그저 한 장의 사진일 뿐이라는 한계를 말해주는 것과 같다.


3.
사진 상의 정보를 더 제거해보기로 한다. 스냅사진으로 보여진다는 이야기는 사진 안에 구체적 정보가 많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시각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제거하고 최소한의 틀만을 남겨두어 기억의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2012. 12. 17. 0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