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편린> 2차 작업물


































2012. 12. 17. 08:04





진행 중인 <기억의 편린>의 1차 작업물들.


"20여년 남짓한 그렇게 길지만은 않은 시간동안 내게도 많은 양의 기억과 추억들이 쌓였다. 그 기억 중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꽤나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가끔씩 들춰내어 곱씹어 볼 수 있는 어떤 분위기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모자란 기억력에 정확한 색감, 향, 날씨, 시간 등의 구체적 정보들까지 담아내고 있진 못하지만 흐릿한 나의 기억들 모두
지금 내가 이 자리까지 걸어 온 내 삶의 일부다.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력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은 선명하지 못한 상으로 남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덕에 계속하여 곱씹으며 음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 사이사이로 정보의 추가와 제거가 반복되며 기억은 진화해 나간다. 그와 동시에,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이 돼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이 공존한다. 이러한 기억의 속성은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나 역시 언제 사라질 지 모를 과거의 한 장면을 기억해내며 추억을 음미하곤 한다. 하지만 불완전하기에 사라져버리기 전에 이미지로 고착화시키고 싶은 욕구 역시 항상 함께 한다. 흐릿한 기억을 붙잡고자 하는 이 욕구가 작업의 원동력이 된다. 기억 속 장면의 느낌과 분위기를 최대한 비슷하게 살려 사진 한 장으로 잊혀지지 않을 기억을 붙잡는다. 그렇지만 기억이 선명한 이미지로 정착되는 순간, 난 그 기억을 애써 떠올릴 의무가 없어진다. 또렷한 사진 한 장을 보며 나 스스로 그 이미지 자체가 나의 기억이라고 판단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억을 되살리는 이미지들은 모두 기억의 속성과 같은 맥락으로 흐릿한 이미지로 남긴다. 불완전한 기억을 흐릿하게 기록한 사진은 정보의 추가와 제거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함이며, 주관적인 나의 기억이 흐릿함으로써 작업을 보는 타인의 또다른 기억과 겹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 최종적으로는 객관적인 모두의 기억이 되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내재되어있다."





4-5살 정도의 꼬마였던 시절, 가족 중 한명과 함께 지하철을 탔던 기억이 있다. 그 날은 유독 날이 좋았고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양도 풍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를 태우고 출발한 전동차는 이내 한강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결을 구경하기 위해 작은 키에 까치발을 세우던 기억. 요즘도 지하철 안을 환하게 밝히는 오후의 햇살을 볼때면 그 날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어쩌면, 이 작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싶은 한 장이 될 수도 있겠다.









절도와 사기라는 개념이 들어서긴 커녕 그런 단어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 집 근처에서 한 아주머니가 포장마차에서 핫도그를 팔았다. 지글지글 기포가 올라오는 기름의 경쾌한 소리와 빨간 케첩을 묻힌 핫도그의 맛이 너무나도 궁금했던 나머지, 머릿 속 사전에도 등재하지 못한 절도와 사기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앞집에 살던 또래녀석과 함께 당시 최고의 놀이거리였던 입김으로 넘기는 둥그런 딱지 두개를 들고선 당당히 포장마차 앞으로 가 핫도그 두개를 주문했다. 기름이 가열되고 핫도그가 입수하여 튀겨질수록 조그만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었고 노릇한 색감과 케첩의 붉은 색감이 뒤섞여 내 손에 쥐어졌을 때 아주 능숙한 솜씨로 두개의 딱지를 매대 위에 올려놓은 뒤 우리는 단박에 조그만 골목길로 뛰어내려갔다. 
그 날 이후 그 포장마차 앞을 지나간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등학생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골은 미용실이라는 이름 대신 미장원이라는 이름이 더 쉽게 통용되는 곳이었다. 더벅머리가 귀와 목을 간질거릴 때마다 찾아가곤 했던 미장원은 할머니들의 휴식처이자 모든 소문의 근원지처럼 보였다. 가끔씩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웃들의 이야기도 전부 그 곳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을테다. 어느 날 동네 어귀 즈음에 미용실이라는 간판을 단 곳이 생겼고 세련된 발음과 조금 더 젊은 주인 아줌마와 고객층에 신선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는 더이상 미장원에 가질 않았다. 미장원이나 미용실이나 변두리 시골마을에서 아무리 잘 포장해봤자 얼마나 촌스러웠을까. 조금 더 젊다해도 할머니와 아줌마의 차이였을 뿐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이제 화려하고 제대로 세련된 미용실, 아니 이제는 헤어샵이라 명명되는 곳들 사이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내는 곳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가끔씩 마주치는 '미용실'이라는 간판 하나에도 이렇게 쉽게 그 때의 기억이 상기되는 것과는 반대로.















학창시절 어스름지는 교실 안에서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던 기억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 장담한다. 학창시절의 나는 학교에서 거의 잠만 잤기 때문에 모든 수업이 끝난 후 졸린 상태에서 나른하게 키던 기지개와 텅 빈 교실의 모습은 너무나도 쉽게 상기시킬 수 있다.


나의 대학생활은 2007년에 시작되었고, 무려 6년동안 학교에 가야하는 날이면 무조건 이 길을 지났다. 당연히 이 길이 학교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고 항상 오가는 곳이었기에 골목의 풍경을 제대로 관찰하며 지나간 적은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면 너무나 낯선 풍경이 보일 때가 있다. 익숙함이란 가끔은 굉장히 무서운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작은 시골마을에 빌라라 불리는 유일한 다세대 주택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뒤에 서울에서 전학생이 왔다. 할머니와의 보금자리 바로 뒷편에 위치했던 그 곳에 전학생의 보금자리가 있었고 나는 심심할 때면 빌라 현관 앞에 서서 전학생의 이름을 외치며 함께 놀 것을 권유하곤 했다. 조그마한 키와 좁은 생각에 당시의 빌라단지는 내겐 너무나 웅장한 하나의 성이자 동시에 거대한 놀이터였다. 아직도 같은 마을에서 거주하시는 할머니의 집으로 찾아가는 날이면 가끔 그 빌라를 찾아본다. 허름하고 낡은 외관보다 너무나 낮고 좁게 느껴지는 현관과 전체적인 빌라의 높이에서 세월을 느낀다.
딱 그만큼 나는 자랐다.





2012. 12. 13. 02:22




모든 것은 단 한 번에 완벽하게 완성될 수 없다.
나라는 존재가 그렇고, 내가 있는 집 역시 마찬가지.
제대로 보여지기 이전에 완성되어가는 모습도 함께 보여지기를 바라며 새로운 집을 짓는다.





2012. 12. 13. 00:05